《고요의 층: Glass Series》
우리는 때로 사물을 이해하지 못할 때, 오히려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의미를 붙잡을 수 없을 때, 시선은 자연스럽게 머문다. 엘라킴의 회화는 그런 시간에서 비롯된다.
열여덟의 나이에 홀로 머물렀던 이탈리아에서, 그녀에게 이국의 언어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사람들의 대화는 종종 온전히 닿지 않았다. 대신 남은 것은 장면들이었다. 식탁 위에 놓인 유리잔들, 천천히 기울어지던 빛, 그리고 서로를 통과하며 겹쳐지던 그림자. 이해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녀는 바라보는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잔은 그때부터 단순한 사물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담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시간이 머무는 하나의 방식에 가까웠다. 화면 위의 잔은 비어 있지만, 그 비어 있음은 고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빛과 시선에 따라 달라지고, 옆의 형상과 겹쳐지며 미묘하게 변한다. 하나의 형태는 홀로 완성되지 않고, 언제나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의 작업은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제작의 반복이라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채우며 하나의 층을 쌓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물감은 겹쳐지며 남고, 흑연은 희미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흔적으로 스며든다. 이전의 시간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다음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화면은 그렇게 조용히 쌓여간다.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작업은 하나의 수행이 된다. 감정을 밀어내기보다 천천히 다스리며 이어가는 이 반복을, 작가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하나의 ‘행복한 수행’으로 받아들인다. 화면 위에 쌓이는 각각의 레이어에는 그때그때 머물렀던 감정과 사색이 스며 있고, 물성과 매개를 통해 그 흔적은 조용히 남는다.
이번 전시 《고요의 층》은 그렇게 쌓여온 시간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각각의 화면은 절제된 상태로 놓여 있지만, 그 안에는 머물렀던 감각과 지나간 순간들이 겹겹이 스며 있다. 비어 있는 듯 보이는 형상은, 바라보는 이의 기억과 시선을 만나며 조금씩 다른 밀도를 만들어낸다.
엘라킴의 Glass Series는 어떤 것을 설명하기보다, 하나의 상태를 조용히 드러낸다. 그녀는 오늘도 하나의 잔을 그린다. 그것은 무엇을 채우기 위한 그릇이 아니라, 하루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다시 흘려보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아주 느리게 쌓여가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큐레이터. 최양원
전시명: 엘라킴 개인전 《고요의 층: Glass Series》
전시 일정: 2026.03.25 (수) – 04.11 (토)
관람시간 13:00–18:30 (수 - 토 운영)
기획 | 최양원